타이포그래피의 패배
한참 지나가버린 얘기지만, 작년 대선 때 얘기좀 하려고요. 정치라든지 공약이라든지에 관한 얘기는 아니예요. 정확히는 정동영 후보의 선거공보의 디자인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와서 찾아보니까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이 여기저기 엿보인다"는 기사도 있고 "무난하고 세련되게 잘만들어진 느낌이었다"고 느끼신 분도 계시네요.
하지만 제게는 정동영 후보의 선거공보가 모든 선거공보 중에서 제일 읽기 불편하게 만들어져 있었어요.
어떤 느낌이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마지막 페이지를 보겠습니다.
띄어쓰기나 안 띄어쓰나 글자 사이 간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에 비해 행 사이 간격이 너무 넓게 벌어져 있어서 읽기 불편합니다. 행 사이가 떠 있는 것은 아마도 사진을 넣느라 그런 모양인데, 그 사진조차도 문장 중간에 아무렇게나 들어가 있어서 글을 읽는 것을 방해해버리죠. 주변 문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진도 있고요.
센터폴드입니다.
공약과 세부적인 정책을 싣는 페이지예요. ‘땀’, ‘꿈’, ‘집’, ‘힘’이라는 주제로 되어 있는 가운데 세번째입니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땀’ · ‘꿈’ · ‘힘’이라는 키워드가 두드러지게 보이는데 유독 저 ‘집’이라는 글자는 색조 탓에 배경 사진과 동화되어 버렸네요.
두 장이 넘는 선거공보들 가운데 다른 것들은 모두 페이지를 좌우로 갈라놓은 데에 비해 정동영 후보의 공보는 위아래로 갈라져 있어요. 그렇다 보니까 글자가 들어갈 공간이 좌우로 길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 줄에 30자가 넘게 들어가버렸어요. 게다가 글이 두 페이지에 걸쳐 있죠, 본문과 공약 둘 다요. 공약을 위해 할애한 첫 여덟 페이지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글을 읽으려면 왼쪽 페이지의 본문을 읽고, 오른쪽 페이지의 본문을 읽은 다음, 왼쪽 페이지의 공약을 읽고, 다시 오른쪽 페이지의 공약을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요.
주황색으로 된 공약 부분은 목록인데 한 줄로 붙어 있어요. 게다가 줄 넘어가는 대로, 페이지 넘어가는 대로 뚝뚝 끊겨 있습니다. 가운뎃점 ( · )이 목록의 불릿과 혼동을 주기도 해요.
저 불릿 말인데, 저 위에 있는 흑백 사진을 배경으로 한 글에도 문장이 새로 시작할 때마다 들어 있었어요. 문장 읽을 때마다 거슬렸지만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런 방식이 약력에도 쓰여요.
약력은 그냥 년도에 따라 세로로 죽 늘어놓아야죠. 이렇게 가로로 붙여놓으면 약력을 문장으로 풀어쓴 것보다도 더 나빠요. 아라비아 숫자로 되어 있는 것이 모두 년도라면 좀 나았을텐데 15대 · 16대 같은 것이 섞여 있어서 더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디자인을 배운 적도 없고, 스스로가 디자인에 감각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책자 읽는 데에 답답함을 느낀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타이포그래피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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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edited on 03/07/2008 14:28 by 퍼즐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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